이론의 활용(성) (The Use(fulness) of Theory) [1]

스테판 바지어 (Stefan Bargheer, [당시] UCLA 사회학과)

번역: 이지원 (뉴욕주립 올버니대 사회학과, [email protected])

로버트 머튼이 1945년, 반半세기도 더 이전에 지적했듯이 이론은 하나의 통일된 개념이 아니다.[2] 그가 이 글을 쓸 때 이론에 대한 최소 여섯 가지 서로 다른 관념이 통용되고 있었으며, 이후 이 목록은 짧아지기보다는 길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념 중 한 관점으로 볼 때 좋은 이론으로 인정되는 텍스트는 다른 관념의 기준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 발 더 앞서나간 주장을 하고자 한다. 한 이론 텍스트의 가치는 이론에 대한 어떤 관념을 적용하는지에 따라 크거나 작아지지만, 그에 앞서 어떤 텍스트가 “이론”으로 분류되는지 역시도 우연히 결정된다는 것이다. 학술적 텍스트들은 경로와 전기를 가지고 있다. 사회학적 텍스트로 가장 널리 알려진 글의 일부는 처음 출판되었을 때는 “경험연구”로 정의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학적 이론”으로 재분류되었다.

1959년에 ⟪일상생활에서의 자아 연출⟫[3]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어빙 고프먼의 박사논문은 한 사례이다. 나는 이 글의 지위가 시간에 따라 변화했다고 지적하고자 하지만, 이 작업이 초기에 주변적인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 책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었다. 이 책은 1961년에 미국사회학회 (오늘날 최우수 학술서적상으로 이름이 바뀐) Maclaver 상을 받았고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the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그리고 American Anthropologist 같은 가장 저명한 사회과학 학술지들에서 열정적이지는 않더라도 호의적인 서평을 다수 받았다. 이 서평들이 극찬했던 것은 이 책이 독창적인 경험적 관찰을 보고하고 있으며 그래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것이었다.

이 서평들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비판이 단 하나 있었다. 이 책에는 이론이 없다. 한 서평자는 ⟪일상생활에서의 자아연출⟫이 막스 베버의 작업과의 토론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비판과 조언은 당황스럽다. 현재 이 텍스트는 현대 사회학적 이론의 교과서적 고전canon 이며 이 주제에 대한 개론 과목들에서 쓰이고 있다. 이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론이며, 저자가 베버와 토론하는 데 애쓰지 않고 그 대신에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제시했기에 이 책은 여전히 계속 읽히고 있다.

한 텍스트의 지위가 어떻게 ‘이론이 없는 텍스트’에서 ‘이론 그 자체’로 극적으로 바뀔 수 있었을까? 이 전환은 이론이라는 개념이 사회학에서 쓰이는 방식에 관한 어떤 사실을 드러내 준다. 나는 고프먼의 사례에 근거하여 이론은 한 텍스트의 내적인 속성이 아니라 텍스트가 활용되는 방식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고프먼의 텍스트가 활용된 것은 서평자들이 이 책을 독창적이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고 생각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상생활에서의 자아연출⟫은 처음 출판되고 나서 몇 년 후 다른 사례들에 적용되었다. 즉 이것은 다른 학자들의 작업에 활용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본래의 연구 맥락에서 다른 연구 맥락으로 이전되었다. 내 주장은 이 책이 이러한 탈맥락화와 재맥락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론의 지위를 획득했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론은 이것을 많은 수의 경험적 사례에 특히 잘 맞게끔 해주는 한 텍스트의 내적인 속성이 아니다. 사태는 정반대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수의 사례에 적용된 텍스트들이 이론으로 불리게 된다.

이러한 경로와 전기를 가지고 있는 텍스트들은 내가 활용에 의한 이론들theories by use이라고 부를 텍스트들이다. 만약 한 텍스트의 활용이 이것을 한 이론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모든 텍스트는 잠재적으로 이론이 될 수 있다. 활용에 의한 이론들은 그저 인정받은 경험연구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의 이론들은 어제의 경험연구이다. 그리고 논의를 연장해 보면 오늘날의 경험연구들은 내일의 이론이 될 것이다. 이 주장은 이론의 활용을 설명하는 데 통상적으로 이용되는 인과관계의 역전이다. 이것은 동시에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보통 가정되는 이론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 관계의 역전이다. 활용에 의한 이론들의 이론으로서의 지위는 저자가 생산하는 것이 아니며 이 이론을 다른 사례들에 적용하는 청중에 의해 생산된다. 그래서 활용에 의한 이론은 일종의 협업 과제이다.

이런 현상은 흔하게 관찰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고프먼과 그의 유명한 저서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같은 이야기가 미국인뿐만 아니라 유럽인, 고전뿐만 아니라 현대 저자들에 의해 쓰인 잘 알려진 대다수의 사회학 텍스트를 설명하는 데 적용될 수 있다. 내가 몇 년 전 신진 이론가 심포지움Junior Theorists’ Symposium에서 발표했을 때, 나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수용에 대해서 분석했다.[4] 이 고전적인 유럽의 텍스트는 내가 이 글에서 예시로 활용한 고프먼의 더욱 현대적인 미국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경험연구에서 사회학적 이론으로의 전환을 경험했다. 경험연구가 사회학적 이론으로 다시 이름 붙여지기 위해서 오직 필요한 요건은 시간의 경과이다. 정의상 한 텍스트는 처음 출판되는 바로 그 순간 이미 다른 사례들로 이전될 수는 없다. 텍스트는 반복적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고 이러한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하다.